주일/대축일 강론

삼위일체 대축일(가해) (나해)(다해)

dudol 0 2,039 2014.06.14 15:51

제1독서: 탈출 34,4ㄱㄷ-6.8-9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
제2독서: 2코린 13,11-13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주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복 음 : 요한 3,16-18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1334년 요한 22세 교황(1316~1334)에 의해 성령강림축일 다음 주일로 지정되었고, 그 후 로마 전례를 거행하는 모든 교회의 의무축일이 되었다. 비오 10세(1903~1914) 교황은 1911년에 이 축일을 대축일로 승격시켰다.

  서공석 신부님의 2012년 강론 자료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요약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모순된 말을 믿으라는 단어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비밀리에 알려 주신 신비스런 단어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준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요약하는 단어입니다. 세 개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성서에는 없습니다. 3세기부터 사용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으로 세상을 떠나신 후,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 제자들이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실천을 회상하면서 그분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계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병을 고쳐 주시던 그분의 마음, 사람들을 돌보아주시던 그분의 몸짓,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시던 그분의 관대함이 모두 그분 안에 계셨던 하느님의 숨결이 하신 일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숨결에 충실하셨으며, 평소 아버지께 기도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의 삶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같은 숨결이 그들 안에도 일하신다고 깨달았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의 숨결인 영이 내려 오셨다.”는 창세기(1,2)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도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도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천사의 입을 빌려 그 수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1,20)이라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서도 가브리엘 천사의 입을 빌려 마리아에게 성령이 내려오셨다.”(1,35)고 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이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나신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으로 세상이 창조되었고,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예언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같은 성령이 일하셔서 예수님이 태어나셨고, 같은 성령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을 발생시킵니다. 그것이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초기 신앙공동체의 관행은 이런 믿음을 배경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신앙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도 바로 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자기 안에 일하시게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돌보아주며 용서합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인간의 관행을 벗어나, 신앙인은 이웃을 돌보아 주고 용서하며, 이웃과의 유대를 강화합니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넓은 세계에 열린 마음으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요한 15,9) 신앙인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데에 유일한 귀감이라는 뜻입니다. 그 아들 됨의 실천은 인간 욕망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그분 안에 살아계셔서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인간인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면 행복할 것이라 상상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죽어서도 잘 살기 위한 대책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이 자기중심적으로 좁은 공간 안에서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넓디넓으신 하느님의 마음을 배워 그분의 자녀 되어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 마음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며, 용서하는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그런 실천을 하신 것은 하느님의 숨결이 그분 안에 살아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 신앙인도 성령을 자기 안에 영접하여 같은 실천을 하도록 노력합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바로 이와 같은 일을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3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서 예수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지만, 인간이기에 그분이 하신 일은 하느님의 일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들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 그 시대 신학자들이 오랜 토의를 거쳐 사용하기 시작한 삼위일체라는 단어입니다. 그들이 이 단어로써 표현하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라는 말은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성령은 하느님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실제 하느님의 숨결, 곧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도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참다운 하느님의 숨결이고 하느님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에도, 구약의 예언자들 안에도, 예수님 안에도, 하느님의 숨결은 일하셨고,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숨결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말하는 삼위일체라는 단어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다 알아들어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인간 예수와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신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듣고, 그 실천을 배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자녀 되어 삽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변화시켜 참으로 당신의 자녀 되게 하십니다. 그것은 그분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실현하시는 일입니다.

  세 분의 이름이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삶을 보고 배우며, 성령이 우리 안에 실현하시는 일에 협조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신앙인으로 삽니다. ‘삼위일체는 한 시대가 필요로 하였던 단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삼위일체는 예수님도 성령도 모두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을 밝히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한다고 고백하는 단어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 4,34-34. 39-40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다. 다른 하느님은 없다.

제2독서: 로마 8,14-17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복음: 마태 28,16-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2012년 묵상 자료)
   바오로 사도의 삼위일체와의 만남의 과정을 사도행전 9장에서 찾아읽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사울(히브리식 이름)은 다마스쿠스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러 가는 길에 주님을 갑작스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울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예수님과 첫 만남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이 만남에서 바오로는 눈먼이가 되어 앞도 보지 못하고, 굶주린 상태로 있었습니다. 주님의 제자 하나니아스를 만나게 된 후 그는 그로부터 기도와 안수를 받고 비로소 눈을 뜨고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그후 며칠 다마스쿠스의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그는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 하였습니다. 성령을 받고, 제자들과 며칠 머물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고 이렇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같은 바오로 사도의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첫 만남은 점차 사도로서 활약해 가면서 더 심화된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닫게 되어 간 것입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 제자들도 바오로의 체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3년여 동안 예수님과 함께 다녔고,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으로 피신해 가시던 스승님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라고 제자들에게 물었을 때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3-16 참조) 라고 대답하였지만,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죽으심, 무덤에 묻히신 이후 다락방에 문을 걸어 잠그고 뜻모를 두려움에 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긴 만남의 결과는 아직도 제자들의 마음의 문이 닫혀 있었고, 신앙의 눈마저 어두움에 쌓여 있게 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그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신 후,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받도록 해 주셨을 때에 비로소 눈이 열리고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바오로 사도나 베드로 사도의 삼위일체와의 만남의 과정들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신앙에 입문하여 점진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라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 성사와 성체 성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뵙지만 아직도 깊이 그분을 알아뵙지 못하며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견진 성사 때 성령을 만나 뵈옴으로 비로소 우리는 성부 하느님의 인류 사랑의 참 모습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의 눈과 빗장을 열어주시기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청해야 할 것입니다.

(과년도 묵상 자료)
   세례자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던 전례가 차츰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사도행전이나 바오로 서간들의 내용을 볼 때 베드로 사도나 바오로 사도의 영향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가 전해 주듯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삼위일체의 가장 오랜 정식인 "은총을 내리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을 베푸시는 성부와 친교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길" 인사말로 전하고 있습니다. 

(과년도 묵상 자료)
   군종신부 시절 짠물교구(인천교구를 타교구 신부들이 그렇게 불렀다) 신부로서 자긍심을 갖기 위해 묵상을 한 것이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 의미와 부합되는 듯 싶어 옮겨 봅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넓은 <바다>와 뙤약볕에 벌거숭이가 되어서야 결정이 이루어지는 <소금> 그리고 소금이 녹아들어 <맛>을 내고 있는 야채나 반찬들(김치나 깎뚜기 등) 이 셋의 관계가 마치 삼위일체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바다 물>은 지구의 2/3를 차지하고 있어 성부 하느님의 편재하심(어느 곳에나 다 계시는 하느님)과 유사하고, 또 우리 인류의 탄생과 연관지어 볼 때 어머니 모태가 양수로 차 있어 태아를 보호하고 있다고 하니 창조의 터이기도 합니다.
   <소금>은, 바닷물이 염전이라는 정해진 구역 안에 갇혀 뙤약볕을 쪼이며 며칠을 보내는 희생의 순간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결정(結晶)됩니다. 약용으로도 쓰이고 조리용으로도 쓰이니 소금의 쓰임새는 성경 안에서만도 꽤 여러 가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바닷물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구체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어 우리 인류에게 다가 온 소금은 성자 예수님의 구원사를 묵상해 보게도 됩니다.
   <맛>은 소금이 온전히 녹아들어 새로운 맛으로 우리에게 다가옴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소금처럼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더 이상 우리에게 당신 모습으로 현존하지 않으시고 녹아든 모습으로 성령을 통해 살아계십니다. 당신의 모습은 더 이상 2천 년 전처럼 그렇게 가까이서 뵙는 분은 아닐지라도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시며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시어 사랑과 친교를 나누도록 도와주고 계십니다.

    미사와 성사, 시편 기도나 찬미가에서 성삼의 이름으로 기도를 봉헌하게 된 것은 초기 교회 교부들의 글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찬미가>는 이미 2세기 사셨던 유스티노(100~165) 성인의 저서에서,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215)의 저서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초기교회 공동체는 이미 삼위일체 세례 정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찬미가로 하느님을 찬미하다 보면 <작곡가>, <연주가>, <청중> 이 셋의 관계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깊이 묵상케 해 줌도 아울러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부는 작곡가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을 빚어 만들어 주셨고, 성자께서는 그 아름다움의 본질을 직접 삶을 통해 깨닫고 느끼며, 듣게 해 주셨고, 성령께서는 작곡가와 연주가의 영적 통교를 통해 음악을 듣는 청중들의 마음에 신비스러운 감흥을 갖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인류는 작곡가의 뜻과 연주가의 표현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되고, 혼을 뒤흔드는 뜨거운 감동과 공감으로 하느님 찬미와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삼위일체의 상호간 일치와 사랑, 그리고 친교와 은총을 나누심은 우리 인간들의 삶에 여러 가지 교훈을 베풀어 주십니다. 부부들이 혼인 서약을 통해 일생 사랑하고 존경하고 신의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고서도 평생 그렇게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오늘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통해 새로운 삶의 모습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자녀 출산 후 부부가 자녀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삼위일체의 아름다운 사랑과 친교의 관계에서 또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구성원 서로 간에 창조의 의지를 공유하고, 그 뜻을 구현하기 위해 서로 협조하고, 상호간 일치를 이룸에 부족함이 있다면 또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1334년 요한 22세 교황(1316~1334)에 의해 성령강림축일 다음 주일로 지정되었고, 그 후 로마 전례를 거행하는 모든 교회의 의무축일이 되었습니다. 비오 10세(1903~1914) 교황은 1911년에 이 축일을 대축일로 승격시켰습니다.

2016.5.22. 소사 성당

 

중학교 학창 시절 YCS(JOC)를 할 때 삼의 원리가 기초였다. See, Judge, Act 세월이 지나면서 단순히 본다는 See 대신에 보고 깨닫고 인식한다는 Awareness로 바뀌었습니다.

- 영어 메들리 삼위일체 쓰기, 말하기, 읽기(문법,어휘,읽기)

- (현필)선생 삼위일체 건강 장수법독소 제거, 자연식, 운동을 삼위일체로 실행하면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오직 죽음뿐이다.

그는 청국장, (천연)식초의 신비함에 대해 극구 강조하였다.

 

세례 성사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전례 예식 안에서 성삼위의 교리가 전래되어 왔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태 3,16-17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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