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대축일 강론

연중 제31주간(나해) - 유다인들처럼 우리도 하루 두 번 이상 기도문을 외웁시다

dudol 0 1,289 2012.11.06 16:21
제1독서 : 신명 6,2-6 이스라엘아 들어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제2독서 : 히브 7,23-28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복음 : 마르 12,28ㄱㄷ-34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적어도 하루 두 번 이상 외우고 낭송하는 내용이 봉독되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신명 6,4-5)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 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 신명기의 말씀은 '메주자'(mezuza; mezuzah 유다인이 대문이나 방문에 걸거나 부착해 놓는 말씀패)에 새겨 문설주에 걸어놓고 문을 드나들 때마다 상기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아, 들어라!"(쉐마 이스라엘!)이란 말씀이 선언되면 모든 유다인들은 지금도 정신차려 하느님 말씀을 듣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론 때에 "쉐마 이스라엘!"하고 말씀드려 자리에서 모두 일어서시도록 해 보았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서서 듣는 자세도 이 관습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해 드리면서 말입니다.


  오늘 위 가르침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에서는 이 세 가지에 하나를 더해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가르침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듣던 말 중에는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oo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는데 oo에 들어가는 말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 신자들은 "정신이요." 라고 다들 말씀하셨습니다.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예라 생각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oo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라는 유행가 노랫말에서 "OO에 들어가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다들 "마음"이라고 답하셨습니다. 마음 씀씀이는 부부지간, 남여지간, 부모와 자녀지간, 신자들 상호지간에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 노랫말에 대비하여 묵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운동 선수들에게 격려의 말로 "기름을 더하라!(加油=짜요)!"라고 합니다. "힘내라!"라는 말을 묵상해 보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때 그에게 더 힘을 내라고 하듯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우리 힘을 다해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 연인들끼리는 "내 목숨(생명) 다 할 때까지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사랑에서도 자신의 한 생명, 한 목숨 다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순교자들이 생명을 바쳐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다 바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이같은 "하느님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성구갑에 넣어 이마에나 심장에 가까운 왼팔뚝에 매고 다니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같은 유다인들의 관습을 본받아 매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외우고 특히 저녁기도 내용 중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덕송>, <망덕송>, <애덕송>을 자주 외우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인터넷 블로그 내용 중 <산길>님의 강론 자료를 보관하고 싶어 아래에 옮겨 담아놓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랑의 이중계명이 선포된다. 여론조사 때마다 프랑스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히던 아베 피에르 신부는 말년에 이르기를 "나이를 먹어갈수록 인생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것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절대로 망쳐서는 안 되는 그 두 가지 일은 사랑하는 것과 죽는 것이다." 그러기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피에르 신부는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영원한 사랑과의 영원한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주어진 약간의 시간일 뿐" 이라면서 "인생의 학교에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든가, 괴물이 되든가," 라고 갈파했다. 왜 사랑해야 하나? 사랑이 어떤 역할을 할까?

  내가 십대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우리 가족은 아버지와 함께 서커스를 구경하기 위해 매표소로 갔는데 우리 앞에 한 가족이 있었다. 그 가족은 아이들이 무려 여덟명이나 되는 대식구였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결코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비싸진 않아도 깨끗했고, 아이들의 행동에는 기품이 있었다. 아이들은 둘씩 짝을 지어 부모 뒤에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아이들은 그날 밤 구경하게 될 어릿광대와 코끼리, 그리고 온갖 곡예들에 대해 흥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전에는 한번도 서커스를 구경한 적 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밤은 그들의 어린 시절에 결코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자랑스런 얼굴로 서 있었다. 매표소의 여직원이 남자에게 몇 장의 표를 원하느냐고 묻자 남자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자랑하듯이 말했다. "온 가족이 서커스 구경을 할 수 있도록 어린이표 여덟 장과 어른 표 두 장을 주시오." 여직원이 입장료를 말했다. 그 순간 아이들의 어머니는 잡고 있던 남편의 손을 놓고 고개를 떨구었다. 남자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남자는 매표소 창구에 몸을 숙이고 다시 물었다. "방금 얼마라고 했소?" 매표소 여직원이 다시 금액을 말했다. 남자는 그만큼의 돈을 갖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떻게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말할 것인가? 한껏 기대에 부푼 아이들에게 이제 와서 서커스를 구경할 돈이 모자란다고 말할 순 없는 일이었다. 이때였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의 아버지가 말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20달러 짜리 지폐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몸을 굽혀 그것을 다시 주워 들더니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여보시오, 선생 방금 당신의 호주머니에서 이것이 떨어졌소." 남자는 무슨 영문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결코 남의 적선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절망적이고 당혹스런 그 상황에서 아버지가 내밀어 준 도움의 손길은 실로 큰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남자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2O달러 지폐를 꼭 움켜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소, 선생. 이것은 나와 내 가족에게 정말로 큰 선물이 될 것이오." 남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들은 곧 표를 사 갖고 서커스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아버지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당시 우리 집 역시 전혀 부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커스 구경을 못 했지만 마음은 결코 허전하지 않았다.

   왜 사랑해야 하나? 사랑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삶의 가치를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짐승이나 괴물이 아니라 존엄한 존재로서 사람답게 해 주기 때문이다. "사랑은 행복의 근원이다. 또한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가장 깊은 부분이고, 우리 안에 살면서 우리를 영원과 연결해 주는 에너지이다. 사랑은 삶에서 결코 사라지지 앉는 유일한 선물이다. 사랑은 공허함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진실의 근원으로써 우리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E. 쿼블러로스)

   더 나아가서 사랑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의 영혼 안에 하느님이 태어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복음에서 제시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에 관해 교황님은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에서 탁월한 가르침을 주신다(18항).

   "이웃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하느님과 내밀한 만남을 가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럴 때에 나는 내 눈과 감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친구는 곧 나의 친구입니다. 겉모습을 넘어서 나는 사랑과 관심의 행위를 보여 달라는 그의 내면의 열망을 깨닫습니다. 나의 삶에서 하느님과 그 어떤 관계도 갖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 이상의 것을 전혀 볼 수 없으며, 그에게서 결코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열심해지려고’, 또 ‘종교적 의무’를 다하려고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면, 나와 하느님의 관계 또한 메말라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사랑이 없는 관계입니다.

   (역으로) 기꺼이 내 이웃을 만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할 때에만 나는 하느님께도 마음을 쓸 수 있습니다. 내가 이웃에게 봉사할 때에만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 이웃 사랑의 힘을 끊임없이 길어 올렸으며, 거꾸로 그 만남은 이웃에 대한 봉사를 통하여 더욱 생생해지고 심오해졌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나뉠 수 없으며, 하나의 계명을 이룹니다."

   둘 모두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에게서 흘러 나오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외부의 ‘계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부에서 얻는 사랑의 체험에서 생겨납니다. 이 사랑은 본질상 다른 사람들과 서로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통하여 자랍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기 때문에, 사랑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대는 단 한 가지 짤막한 계명을 받았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침묵하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하십시오.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십시오. 용서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하십시오.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이 뿌리에서는 선한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요한서간 강해' 7권 8장)   작성자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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